외젠 드 보아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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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외젠 드 보아르네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의붓아들로, 프랑스 혁명기부터 나폴레옹 전쟁 시기까지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781년 파리에서 태어나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아들로 성장했으며,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어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이탈리아 통치에도 기여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는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지위를 받았으며, 1824년 뮌헨에서 사망했다. 그는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 아말리에 폰 바이에른과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유럽 왕가와 귀족 가문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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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드 보아르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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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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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Eugène Rose de Beauharnais (외젠 로즈 드 보아르네) |
출생 | 1781년 9월 3일 |
출생지 | 프랑스 파리 |
사망 | 1824년 2월 21일 (향년 42세) |
사망지 | 바이에른 뮌헨 |
매장지 | 뮌헨 성 미카엘 교회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서명 | Signatur Eugène de Beauharnais.PNG |
작위 | |
이탈리아 부왕 | 1805년 7월 7일 - 1814년 4월 20일 |
베네치아 공 | 1807년 12월 17일 - 1824년 2월 21일 |
프랑크푸르트 대공 | 1813년 10월 26일 - 1813년 12월 |
로이히텐베르크 공 | 1817년 11월 14일 - 1824년 2월 21일 |
가문 | |
가문 | 보아르네 가문 |
아버지 |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
어머니 | 조제핀 드 보아르네 |
양아버지 | 나폴레옹 1세 |
결혼 및 자녀 | |
배우자 | 아우구스테 폰 바이에른 공주 (1806년 결혼) |
자녀 | 조제피네 외제니 아우구스트 아멜리 테오도린다 카롤린 클로틸드 공주 막시밀리안 |
군 경력 | |
소속 | 프랑스 제1 공화국 프랑스 제1 제국 이탈리아 왕국 |
주요 전투 |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사칠레 전투 칼디에로 전투 피아베 강 전투 타르비스 전투 라브 전투 바그람 전투 보로디노 전투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 크라스니 전투 뫼케른 전투 칼디에로 전투 민치오 강 전투 |
기타 정보 | |
신분 | 왕족, 귀족 |
직책 | 이탈리아 부왕 |
2. 생애
1781년 9월 3일 파리에서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자작과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783년 여동생 오르탕스가 태어났으나, 부모는 1785년 이혼하였다. 프랑스 혁명 중 아버지 알렉상드르는 처형되었고, 어머니 조제핀은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1795년, 외젠은 아버지의 유품인 칼을 돌려받기 위해 당시 반란 진압으로 명성을 얻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찾아갔다. 이 만남을 계기로 어머니 조제핀은 나폴레옹과 인연을 맺어 1796년 결혼하였다. 외젠은 계부 나폴레옹 휘하에서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1798년 이집트 원정에 동행했다. 원정 중 어머니 조제핀의 불륜 문제가 불거져 나폴레옹이 이혼을 고려했으나, 외젠과 오르탕스 남매의 간청으로 이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외젠은 여러 전투에서 공적을 세우며 빠르게 승진했고, 유능함과 성실함으로 나폴레옹의 깊은 신뢰를 받았다. 1806년, 나폴레옹은 그를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으로 임명하고,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딸 아우구스테 아말리에 공주와 결혼시켰다. 정치적인 이유로 이루어진 결혼이었지만, 부부 사이는 원만하여 일곱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형제들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외젠과 그의 어머니 조제핀을 적대시했다. 1809년, 외젠은 후계자 문제로 고민하던 나폴레옹을 위해 어머니 조제핀에게 이혼에 동의하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쟁 말기인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외젠은 뮈라의 배신 등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탈리아 전선을 지켰다. 장인인 바이에른 국왕의 귀순 권유를 거절하고 싸웠으나, 1814년 4월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결국 항복했다. 이후 장인에게 나폴레옹에게 더 이상 협력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작위를 받아 뮌헨에서 여생을 보냈다. 1824년 뮌헨에서 사망했다.
2. 1. 출생과 가족 배경
외젠 로즈 드 보아르네(Eugène Rose de Beauharnais|프랑스어)는 1781년 9월 3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Alexandre de Beauharnais|프랑스어) 자작이었고, 어머니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마르티니크(Martinique) 출신의 마리 조제프 로즈 타셰 드 라 파제리(Marie Josèphe Rose Tascher de la Pagerie|프랑스어)였다. 어머니는 훗날 나폴레옹과 재혼하면서 조제핀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지게 된다. 외젠의 아버지는 사르 보병대(Saar infantry regiment|프랑스어)와 라 로슈푸코 공작 연대(La Rochefoucauld regiment|프랑스어) 소속 장교였다.1783년 여동생 오르탕스(Hortense de Beauharnais)가 태어났지만, 같은 해 부모는 별거에 들어갔다. 아버지 알렉상드르는 이미 조제핀과 결혼 전 다른 여성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적이 있었고, 조제핀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1785년 봄에 이혼했으며, 재판 결과 아들 외젠은 아버지가, 딸 오르탕스는 어머니가 맡기로 했다. 외젠은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의 보살핌 아래 여러 기숙학교를 다녔다. 어머니 조제핀은 1788년 여름 오르탕스를 데리고 마르티니크의 친가로 돌아갔으나, 1790년 가을 흑인 노예 봉기 등 불안정한 정세로 인해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아버지 알렉상드르는 자유주의자로서 프랑스 혁명에 동조하여 삼부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의장직까지 맡았다. 이후 다시 군인으로 돌아가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당시 장군으로 복무하며 1793년 봄에는 라인 방면군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마인츠 공방전(1793년)에서 패배한 후 영국군과 내통했다는 의심을 받아 투옥되었고, 공포 정치가 끝나기 직전인 1794년 7월 23일(또는 24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어머니 조제핀 역시 남편과 연좌되어 투옥되었으나,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한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인 1794년 8월 3일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조제핀은 흩어져 살던 아이들을 불러 모아 생계를 꾸려나갔다. 외젠에게는 목수 일을, 오르탕스에게는 재봉사 일을 시켰다. 1795년, 모든 시민이 무기를 반납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외젠은 당시 방데미에르 13일 반란을 진압하여 명성을 얻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을 찾아가 아버지의 유품인 칼을 간직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나폴레옹은 소년의 간청에 감동하여 칼을 돌려주었고, 이를 계기로 조제핀이 나폴레옹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방문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조제핀과 나폴레옹은 1796년 3월 9일에 결혼했다. 여동생 오르탕스는 어머니의 재혼을 찬성했지만, 외젠은 반대했다.
2. 2. 프랑스 혁명과 초기 경력
1781년 9월 3일 파리에서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자작과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783년 여동생 오르탕스가 태어났지만 부모 사이는 좋지 않았다. 아버지 알렉상드르는 외젠이 태어나기 전부터 다른 여성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 등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고, 교양 없는 조제핀을 업신여겼다. 결국 두 사람은 1785년 봄에 이혼했고, 외젠은 아버지 알렉상드르와, 오르탕스는 어머니 조제핀과 살게 되었다. 조제핀은 1788년 오르탕스를 데리고 마르티니크의 친가로 갔다가 1790년 가을 노예 봉기 등 불안한 정세 때문에 파리로 돌아왔다.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자유주의자였던 아버지 알렉상드르는 혁명에 동조하여 삼부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의장까지 맡았다. 이후 다시 군인으로 돌아가 1793년 라인 방면군 최고 사령관이 되었으나, 영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적과 내통했다는 의심을 받아 투옥되었다. 어머니 조제핀도 연좌제로 함께 투옥되었다. 1794년 7월 24일 알렉상드르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으나, 3일 후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면서 조제핀은 8월 3일 석방되었다. 석방된 조제핀은 외젠을 불러들여 목수 일을, 오르탕스에게는 재봉사 일을 시켰다.
1795년, 모든 시민이 무기를 반납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외젠은 당시 반란 진압으로 유명해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찾아가 아버지의 유품인 칼을 간직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나폴레옹은 소년의 요청에 감동하여 칼을 돌려주었고, 이후 조제핀이 답례차 방문한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1796년 3월 9일 결혼했다. 오르탕스는 어머니의 재혼을 찬성했지만 외젠은 반대했다.
외젠은 아버지가 사망한 직후 프랑스 혁명군에 합류하여, 처음에는 방데 전쟁 중 Lazare Hoche|라자르 오슈fra 장군의 수행원으로 복무했다.[1] 그러나 1년 안에 어머니 조제핀의 주선으로 파리로 돌아왔다.[2] 1797년 6월 30일 제1 헝가리 기병 연대의 조교 소위로 입대하여, 계부 나폴레옹의 부관으로서 프랑스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가했다.[2] 캄포포르미오 조약(1797년 10월 17일) 이후에는 이오니아 제도와 로마로 파견되었다.[2]

1798년, 외젠은 나폴레옹을 따라 이집트와 시리아 원정에 참여했다. 그는 야파 공방전에 참전했고, 아크레 공방전에서 부상을 입었다.[2] 원정 기간 중 어머니 조제핀의 불륜(이폴리트 샤를과의 관계)이 드러나 나폴레옹이 이혼을 고려하는 위기가 닥쳤다. 외젠은 나폴레옹이 이 일로 고뇌하면서도 자신에게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주는 것에 감동하며, 어머니에게 즉시 관계를 정리할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영국군에게 압수되어 전달되지 못했다. 결국 외젠과 오르탕스 남매의 눈물 어린 간청에 나폴레옹은 이혼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이후 조제핀의 외도 문제도 정리되어 부부 관계가 안정되자 외젠은 안도했다.
1799년 가을, 외젠은 나폴레옹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와 서로의 불륜으로 소원해졌던 계부와 어머니의 화해를 도왔다. 18 브뤼메르 쿠데타 당시에는 나폴레옹을 따라 생클루로 가서 500인 평의회를 해산시키는 데 참여했다. 쿠데타 이후 나폴레옹이 최고 통령(최고 집정관)이 되자, 외젠은 집정관 친위대의 chasseurs à cheval|샤쇠르 아 슈발fra 대장으로 임명되었다.[2] 그는 마렝고 전투(1800년)에서 친위대 기병대의 돌격을 이끌며 두각을 나타내어 chef d'escadron|슈프 드 스쿠아드롱fra(소령급)으로 승진했다.[2][3] 1803년에는 파리의 보아르네 저택을 매입했다.

통령(집정관) 시대 동안 꾸준히 계급이 오른 외젠은 1804년 프랑스 제1제국이 수립된 직후 여단장으로 승진했다.[2] 1805년 2월 1일 칙령에 따라 국무대총재(Arch-Chancellor of State)로 임명되었고[2] prince français|프랑스 공작fra의 지위를 받았다.
2. 3. 프랑스 제국과 이탈리아 부왕
18 브뤼메르 쿠데타(Coup of 18 Brumaire) 이후 나폴레옹이 최고 집정관이 되자 외젠은 집정관 친위대(Consular Guard)의 샤쇠르 아 슈발(chasseurs à cheval) 대장으로 임명되었다.[2] 그는 마렝고 전투(Battle of Marengo)에서 친위대 기병대의 돌격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슈프 드 스쿠아드롱(chef d'escadron)으로 승진했다.[2][3] 집정관 시대에 계급을 올린 후, 외젠은 1804년 제1 프랑스 제국(First French Empire)이 수립된 직후 여단장으로 승진했다.[2]1804년 5월 18일, 프랑스 제국이 선포되면서 외젠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 토피시에(Grand officier)가 되었고, 사단장 및 황제 근위대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나폴레옹은 그의 '명예와 충성심'을 신뢰했다.[11] 1805년 2월 1일 칙령으로 외젠은 국무대총재(Arch-Chancellor of State)[2]로 임명되었고 프랑스 공작(prince of France)이 되었다. 또한 원로원 의원이자 레지옹 도뇌르 그랑 테글(Grand aigle)이 되었다.[11]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근위대 사령관으로서 외젠은 1805년 5월 26일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밀라노로 먼저 가서 준비했다.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형 조제프나 조카 나폴레옹 샤를 보나파르트를 왕위에 앉히려 했으나 그들이 거절하자 직접 철관을 썼다. 1805년 6월 7일,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입법 의회에 외젠을 24세의 나이로 이탈리아 부왕으로 임명했다.[4] 그는 이곳에서 생애의 절반 가까이를 보내게 된다.
1805년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 외젠은 직접적인 지휘보다는 군대 조직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2] 앙드레 마세나 장군이 이탈리아 원정군을 지휘하는 동안, 외젠은 나폴리 왕국의 중립 위반에 대비해 예비군을 창설했다.[2]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의 프랑스 승리 후, 나폴레옹은 바이에른 왕국과의 동맹 강화를 위해 외젠과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딸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타 공주의 결혼을 주선했다. 이로 인해 그녀와 바덴의 세습대공 칼의 기존 약혼은 파기되었다. 1806년 1월 12일 외젠은 나폴레옹에게 공식적으로 입양되었고,[2] 베네치아 공작 칭호를 받았다. 프랑스 제위 계승권에서는 제외되었지만, 1806년 2월 16일 나폴레옹에게 적법한 아들이 없을 경우 이탈리아 왕위의 추정상속인으로 선포되었다.[2] 정치적 결혼이었음에도 외젠과 아우구스테 부부 사이는 좋았으며, 일곱 자녀를 두었다.

이후 몇 년간 외젠은 이탈리아 왕국 통치에 전념하며 유능한 정치가이자 행정가임을 증명했다.[2] 그는 군사 공사(만토바 요새화, 로카 단포 확장), 공공 사업(도로 건설, 베네치아 조선소 복원, 베로나 주변 늪지 배수), 그리고 나폴레옹의 민법, 상법, 형법 공포를 감독했다.[2] 1808년 해체된 교황령으로부터 마르케가 왕국에 합병되자, 외젠은 교황청과의 관계 악화를 막고 경제적 이익을 통해 지역 주민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2]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 외젠은 이탈리아 원정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르니에, 샤르팡티에, 마크도날과 같은 유능한 장군들이 그를 보좌했다.[5] 1809년 4월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에게 사칠레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5월 피아베강 전투와 6월 라브 전투에서 승리했다.[5]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군을 오스트리아로 소환했고,[5] 외젠은 다뉴브강의 로바우섬에서 주력군과 합류하여 바그람 전투에 참전했다.[5]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외젠은 이탈리아 군단(IV 군단)을 지휘했다. 그는 오스트로브노, 비테프스크, 스몰렌스크, 보로디노, 말로야로슬라베츠, 크라스노예, 베레지나강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1] 1812년 12월 나폴레옹과 조아킴 뮈라가 후퇴하는 군대를 떠나자, 외젠은 포즈난에서 그랑드 아르메의 남은 병력을 지휘했다.[7] 그는 1813년 1월부터 5월까지 라이프치히로 군대를 후퇴시켰고, 이후 나폴레옹 휘하에서 뤼첸 전투에 참여했다.[1][2]
이후 외젠은 이탈리아로 돌아와 군대를 재편성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침공에 대비했다.[2] 1814년 1월, 조아킴 뮈라의 나폴리 왕국이 조약을 맺고 이탈리아 전선에서 이탈하고 장인인 바이에른 국왕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외젠은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하기를 거부했다. 또한 왕국을 포기하고 프랑스 방어에 참여하라는 나폴레옹의 요청도 거절했다.[2] 1813-1814년 이탈리아 전역 동안 그는 포강 계곡에서 적의 진격을 늦추기 위한 일련의 교전을 벌이며 아디제강까지 질서 있게 후퇴했다.[2] 1814년 2월 8일 민치오강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일부 성공을 거두었으나, 결국 타로강과 누레강 전투에서 패배했다.[2] 4월 16일, 나폴레옹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왕위에서 퇴위한 지 5일 후, 외젠은 오스트리아 사령관 하인리히 폰 벨가르드와 Convenzione di Schiarino-Rizzino|스키아리노-리치노 협약it에 서명하여 적대 행위를 종결했다.[1] 4월 20일 밀라노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이탈리아 왕위에 오르려던 시도는 실패했고, 4월 23일 만토바 조약을 통해 왕국 통치권을 최종적으로 포기했다.[1]
2. 4. 나폴레옹 전쟁과 몰락
아버지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가 사망한 직후 프랑스 혁명군에 합류하여, 처음에는 방데 전쟁 중 라자르 오슈 장군의 수행원으로 복무했다.[1] 그러나 어머니 조제핀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재혼하면서 파리로 돌아왔고,[2] 1797년 이탈리아 원정에서 계부 나폴레옹의 부관으로 복무하기 시작했다.[2] 이후 이오니아 제도와 로마로 파견되었으며,[2] 1798년에는 이집트 원정에 동행하여 야파 공방전에 참전하고 아크레 공방전에서 부상을 입었다.[2]
1799년 가을 나폴레옹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와, 서로의 불륜 문제로 소원했던 나폴레옹과 어머니 조제핀의 화해를 도왔다.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당시 나폴레옹을 따라 생클루에서 500인 평의회 제압에 참여했다. 쿠데타 후 나폴레옹이 제1통령이 되자, 외젠은 통령 근위대의 기마 샤쇠르 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2] 마렝고 전투에서 근위 기병대의 돌격을 이끌며 두각을 나타내 Chef d'escadron|셰프 데스카드롱fra(소령급)으로 승진했다.[2][3]
1804년 제1 프랑스 제국 수립 직후 여단장으로 진급했으며,[2] 1805년 2월 1일 국무대신( Archi-chancelier d'État|아르시샹슬리에 데타fra )[2]으로 임명되어 프랑스 황족(prince français|프랭스 프랑세fra)의 지위를 얻었다.
제국 근위대 사령관으로서 1805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왕 즉위식에 앞서 밀라노에 도착했다. 나폴레옹은 외젠을 이탈리아 부왕으로 임명했다(1805년 6월 7일).[4] 1806년 1월, 나폴레옹은 바이에른과의 동맹 강화를 위해 외젠과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딸 아우구스테 아말리에 공주의 결혼을 주선했으며, 같은 해 외젠을 공식적으로 양자로 입양했다.[2] 이 결혼은 아우구스테 공주에게 이미 바덴의 카를이라는 정혼자가 있었음에도 나폴레옹이 강행한 것이었으나, 외젠 부부의 금슬은 좋았으며 슬하에 7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프랑스 제위 계승권에서는 제외되었으나, 이탈리아 왕위의 추정상속인으로 선포되었다.[2] 부왕으로서 외젠은 이탈리아 왕국의 통치에 전념하며 행정 능력을 발휘했다. 군사 시설 정비(만토바 요새화, 로카 단포 확장), 공공 사업(도로 건설, 베네치아 조선소 복원, 베로나 인근 습지 배수), 나폴레옹 법전(민법, 상법, 형법) 공포 등을 감독했다.[2] 1808년 교황령에서 편입된 마르케 지역 주민들을 성공적으로 통합하기도 했다.[2]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 외젠은 그르니에, 샤르팡티에, 에티엔 마크도날 등 유능한 장군들의 보좌를 받으며 이탈리아 방면군을 지휘했다.[5] 1809년 4월,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과의 첫 전투인 사칠레 전투에서는 패배했으나,[5] 이후 피아베강 전투(5월)와 라브 전투(6월)에서 승리하며 전세를 역전시켰다.[5]
2. 5. 몰락 이후의 삶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패배 이후 프랑스 제국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이탈리아 왕국 부왕이었던 외젠은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오스트리아 군대가 포 강 평야를 위협했고, 나폴리 국왕 뮈라는 대프랑스 동맹 측과 내통하며 외젠을 배신했다. 외젠은 장인인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이탈리아 왕위를 보장받으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1] 그는 1814년 2월 14일 민초강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고군분투했지만 전세를 뒤집기는 어려웠다.1814년 4월 11일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외젠 역시 항복했다. 4월 20일 밀라노에서 재무장관 주세페 프리나가 폭동으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탈리아 왕국 유지는 불가능해졌고, 4월 26일 외젠은 부왕 자리에서 물러나 가족과 함께 장인의 나라인 바이에른으로 망명을 떠났다. 그는 막시밀리안 1세에게 더 이상 나폴레옹에게 협력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1814년 6월, 외젠은 뮌헨에 정착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 조제핀이 사망하자 파리로 가서 말메종 궁전을 상속받았다. 그는 복위한 부르봉 왕정복고의 루이 18세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로부터 명예로운 대우를 받았다.[2] 그러나 외젠은 즉시 정치 활동을 포기하고 바이에른의 아내 가족에게 돌아갔다.[2] 빈 회의에서 그는 자신의 영지와 연금을 확보하려 했으며, 한때 베르나도트가 다스렸던 폰테코르보 공국을 제안받기도 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여 백일천하를 시작했을 때, 외젠은 빈에 있다가 뮌헨으로 돌아왔다. 그는 장인인 막시밀리안 1세의 요구로 바이에른을 떠나지 않았으며, 워털루 전투를 포함한 백일천하 기간 동안 중립을 지켰다.[2]


나폴레옹 몰락 후, 외젠은 장인으로부터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작위와 아이히슈테트 후작령을 받아 비텔스바흐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뮌헨에서 남은 생애를 보내며 정치나 군사 활동에는 관여하지 않고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고 미술품 수집에 힘썼다.[2] 또한 부르봉 왕정복고 시대의 프랑스 망명자들, 예를 들어 앙투안 마리 샤망 드 라발레트 등을 도왔으며,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된 나폴레옹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2]
1822년부터 외젠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1823년 두 차례의 뇌졸중을 겪은 후, 1824년 2월 21일 뮌헨에서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3. 결혼과 자녀
나폴레옹은 자신의 양자인 외젠을 유럽 왕가와 연결시키기 위해 바이에른 공주와의 정략결혼을 주선했다. 당시 바이에른은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왕국으로 승격된 상태였다. 이에 따라 외젠은 1806년 1월 14일, 나폴레옹에게 입양된 지 이틀 만에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국왕의 장녀인 아우구스테 아말리아 루도비카 게오르기아(1788~1851)와 뮌헨에서 결혼했다.[15] 비록 정치적인 이유로 맺어진 결혼이었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817년 11월 14일, 장인인 막시밀리안 1세는 외젠에게 라이히텐베르크 공작 작위와 아이히슈테트 후작령을 수여하고 "전하"(Royal Highness)의 칭호를 부여했다.
외젠과 아우구스타 사이에서는 7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이름 | 생몰년 | 주요 사항 |
---|---|---|
조제핀 막시밀리엔느 외제니 나폴레옹 | 1807년 3월 14일 – 1876년 6월 7일 | 스웨덴-노르웨이의 왕 오스카르 1세의 왕비. 나폴레옹의 옛 약혼자였던 데지레 클라리의 며느리. |
외제니 오르탕스 오귀스트 | 1808년 12월 22일 – 1847년 9월 1일 | 콘스탄틴 폰 호엔촐레른-헤힝겐 후작과 결혼. |
오귀스트 샤를 외젠 나폴레옹 | 1810년 12월 9일 – 1835년 3월 28일 | 제2대 라이히텐베르크 공작, 산타 크루스 공작. 마리아 2세 여왕의 첫 번째 남편(왕배). 자녀 없이 요절. |
아멜리 오귀스트 외제니 나폴레옹 | 1812년 7월 31일 – 1873년 1월 26일 | 브라질 제국의 황제 페드루 1세의 두 번째 황후. |
테오델린데 루이즈 외제니 오귀스트 나폴레옹 | 1814년 4월 13일 – 1857년 4월 1일 | 뷔르템베르크 백작 및 초대 빌헬름 폰 우라흐 공작과 결혼. |
카롤린 클로틸드 | 1816년 1월 15일 – 1816년 1월 25일 | 유아기에 사망. |
막시밀리앙 조제프 외젠 오귀스트 나폴레옹 | 1817년 10월 2일 – 1852년 11월 1일 | 제3대 라이히텐베르크 공작.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1세 황제의 장녀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여대공과 결혼. 장인으로부터 "로마노프스키 친왕" 칭호와 "전하"(His Imperial Highness) 호칭을 받음. |
현재 라이히텐베르크 공작인 니콜라 드 보아르네는 막내아들 막시밀리앙의 장남 니콜라이의 후손이다.
4. 칭호
1807년 12월 20일, 외젠은 "베네치아 공(Prince de Venise)" 작위를 받았다. 이는 1805년 오스트리아로부터 획득한 베네토주가 1806년 3월 30일 보나파르트의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면서 신설된 작위였다.
1810년, 나폴레옹은 레겐스부르크 대주교이자 프랑크푸르트 대공인 칼 폰 달베르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외젠을 대공국의 헌법상 상속자로 임명했다. 폰 달베르크는 연합군의 프랑크푸르트 점령이 임박한 1813년 10월 26일 퇴위했고, 외젠은 같은 해 12월 연합군이 프랑크푸르트를 점령할 때까지 명목상의 대공이 되었다.
그는 또한 "프랑스 제국의 국가 대총재(Archichancelier d'État de l'Empire de France프랑스어)"라는 무보수 직위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개선문 남쪽 기둥 24번에 BEAUHARNAIS라고 새겨져 있다.
그가 보유했던 주요 칭호는 다음과 같다.
칭호 | 수여/시작일 | 종료일 (해당하는 경우) |
---|---|---|
프랑스 황태자 (Prince français프랑스어) | 1805년 2월 1일 | - |
이탈리아 왕국 부왕 | 1805년 7월 7일 | 1814년 4월 20일 |
베네치아 공작 | 1807년 12월 17일 | - |
프랑크푸르트 대공 | 1810년 3월 1일 | 1813년 12월 |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 1817년 11월 14일 | - |
아이히슈테트 후작 | 1817년 11월 14일 | - |
한편, 1810년 4월 9일 특허장에 의해 그의 어머니인 황후 조제핀 드 보아르네는 나바라 공작 부인(duchesse de Navarre프랑스어)에 서임되었다. 이 칭호는 조제핀이 사망하면 반환될 예정이었으나, 1814년 외젠의 아들들인 아우구스트와 막시밀리앙은 할머니의 권리에 따라 나바라 공작(duc de Navarre프랑스어) 칭호를 계승했다.
5. 평가
- A. du Casse, « ''Mémoires et correspondance du prince Eugène'' », 10권, in-8판, 1858-1860 ;
- 보도콩트 장군, « ''Histoire politique et militaire du prince Eugène'' », 파리, 1828, 2권 in-8판 ;
- ''Almanach de Gotha'', 고타, 1931 ;
- 장 오탱, ''외젠 드 보아르네: 조세핀으로부터 나폴레옹까지'', 7판, 페랭(Perrin), 파리, 2003 (초판 1989), 454쪽, ISBN 978-2262020071, [https://www.decitre.fr/livres/eugene-de-beauharnais-9782262020071.html 온라인 소개], (나폴레옹 기념 대상)
- 르네 블레뮤, « ''외젠 드 보아르네, 명예를 향한 바람'' », 프랑스-앙피르 출판사, 파리, 1993.
- 장-클로드 포보, ''조세핀, 크레올 출신 황후. 프랑스 혁명기의 안틸레스 섬 노예제와 노예 매매'', 암마탄 출판사, 2010, 390쪽, ISBN 978-2-296-11293-3.
참조
[1]
백과사전
BEAUHARNAIS (Eugène-Rose, prince de)
https://gallica.bnf.[...]
Librairie Historique et Nobilaire
1934
[2]
학술지
BEAUHARNAIS, Eugène de
https://www.napoleon[...]
2021-07-01
[3]
서적
Napoleon's Satellite Kingdoms
[4]
학술지
The Napoleonic Kingdom of Italy
www.jstor.org/stable[...]
1967
[5]
서적
The emperor's last victory: Napoleon and the Battle of Wagram
Weidenfeld & Nicolson
2004
[6]
서적
1812 :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Harper Perennial
2005
[7]
웹사이트
A day trip to Zvenigorod
https://www.rbth.com[...]
Russia Beyond the Headlines
2020-01-29
[8]
문서
En 1794, juste avant la chute de Robespierre. Joséphine étant en prison, ses deux enfants Eugène et Hortense avaient été confiés à des mains étrangères, {{abbr|1=M{{sup|lle}}|2=Mademoiselle}}{{#if:{{{1|}}}| {{{1}}}}} Lannois, une gouvernante prit soin de la jeune Hortense ; Eugène fut mis en service et en apprentissage chez un menuisier.
[9]
문서
.Eugène entre dans la carrière militaire en qualité d'aide-de-camp de son beau-père ; mais avant de partir pour l'Italie, il complète son éducation imparfaite.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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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ù il entre le premier, à la tête de l'avant-garde, le {{Date|8|novembre|1798}}, et mérite le grade de lieutenant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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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Date|4|juin|1804}}, jour anniversaire de [[:fr:Bataille de Marengo|Marengo]], Napoléon, empereur, donna à son beau-fils le titre de ''Prince français''
[12]
문서
Quand Napoléon le revoit, il le tient longtemps pressé sur son cœur, puis le présente aux maréchaux et à son état-major, il s'écrie : « ''Ce n'est pas seulement le courage qui aurait amené ici Eugène; il n'y a que le cœur qui puisse opérer de pareils prodiges !''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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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s cette circonstance, où Napoléon ne pouvait motiver sa résolution qu'en faisant valoir l'intérêt de la France, Joséphine sait se taire et se résigner ; mais tremblant de voir l'avenir de son fils compromis, et portant ses yeux remplis de larmes sur Eugène, elle dit à l'Empereur : « ''Une fois séparés, mes enfants ne seront plus rien pour vous. Faites Eugène roi d'Italie, et votre politique, j'ose le croire, sera approuvée par toutes les puissances de l'Europe.'' » — Le prince dit alors vivement : « ''Ma bonne mère, qu'il ne soit nullement question de moi dans cette triste occurrence. Votre fils ne voudrait pas d'une couronne qui semblerait être le prix de votre séparation.'' » Napoléon, que la noblesse de ce discours émeut profondément, tend la main au vice-roi, la serre avec force et répond avec gravité : « ''Je reconnais Eugène dans ces paroles; il a raison de s'en rapporter à ma tendresse.'' »
[14]
문서
Nous avons tous commis des fautes, dit Napoléon, Eugène est le seul qui n'en ait pas fait.
[15]
문서
Le voyage de noces, de Munich à Milan, en passant par Venise, est triomphal et la princesse semble très éprise de son époux. En 1814, elle écrit à son père : « ''Je le suivrai partout, bien sûre qu'il ne s'écartera jamais du chemin de la vertu et de l'honneur'' ». Après la perte du trône d'Italie, c'est en Bavière, à Munich, que vivent le prince Eugène et son épouse. Ils s'y font construire un palais où le prince installe sa bibliothèque ainsi qu'une collection de tableaux qu'il ouvre au public, constituée en partie par l'héritage de sa mère. Lui-même pratique le dessin et la musique. Goethe, lorsqu'il le rencontre à Marienbad, le juge « ''un grand caractè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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